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162번지 바닷가에 위치한 야산이 약409년 전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참전했던 일본수군의 집단묘지로 알려져 대대적인 홍보가 되고 있다.
이곳이 정유재란 때 일본수군의 묘군 으로 알려지기는 극히 최근의 일로 2002년 이 마을에 거주하는 이기수(78,남)씨의 증언이 결정적 단서가 되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했고 일본에는 2004년11월 일본 북해도 사람들 6명이 다녀가고 올 5월5일에는 모 신문사 사장과 일본 히로시마 수도대학 히구마 다케요시 교수 등 일행이 다녀가면서 일본신문에 이 같은 사실을 기고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여 보도직후인 8월15일에는 20여명의 일본인들이 와서 묘지를 참배, 향을 피우고 봉오도리(일본 천도춤)춤을 추며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일본장군 마다시와 휘하 2천5백 전사자들의 명복을 비는 행사가 있었으며 이 같은 사실들이 TV, 신문 등에 보도되었으며 2007년에는 400여명의 일본인들이 대거 진도를 방문할 예정이라 한다.
지난 9월25일에는 이 같은 문제가 ‘호남학강좌’ 세미나에서 다루어지고 11월3일에는 진도학회주관 ‘국제학술대회’에서 왜덕산을 일본수군의 집단묘지로 기정사실화하는 글이 일본 히구마 다케요시 교수에 의해 발표되기도 했다.
이 같은 과정들로 인하여 왜덕산은 일본 관광객유치로 앞으로는 ‘영등축제’보다도 더 큰 기여도를 낳아 관광진도의 새 물고를 틀 것으로 군 당국은 전망, 온통 기대에 부풀어 있어 왜덕산은 일본군인의 집단묘지임이 기정사실로 굳어져가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진도군에서는 ‘명량대첩제’ 창설을 계기로 2006년 여름 묘역을 벌초하고 안내판을 세웠으며 왜덕산복원비 10억원을 전라남도 도청에 신청하여놓고 있으며 군 당국에서는 이를 ‘왜덕산 성역화사업’ 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다.
“외국과 관련된 역사유적, 과학적 근거 있어야”
이와 같이 일본 참배단들이 줄을 잇고 당국의관심이 고조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왜덕산이 정유재란 시 바다에서 전사하여 떠밀려온 일본수군의 집단묘지라는 확실한 근거는 아직 없으니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향토사를 비롯한 어떤 역사기록에도 이런 기록은 없다.
심지어 곽충로(진도군 교육감, 진도군수를 지내고 벽파진에‘명량대첩비’를 세웠으며 ‘진도군지’를 방대하게 저술한 학자로 왜덕산이 있는 고군면 출신)의 ‘진도군지’ 1976년판에도 한마디 언급이 없으며 또한 다른 어떤 기록에도 이 같은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2)왜덕산 증언자가 내산마을 이기수씨 한사람밖에 없다.
3)폐허의 전란 속에서 적군의 시체를 수습하여 봉분을 만들어 장사를 지내주었다는 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반역행위로써 관에서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며 생명을 건 이런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4)묘지하나를 봉분을 만들어 조성하려면 2-30명이 동원되어야하는 큰 노력과 많은 경비가 소요되는 대력사이다.
하물며 삽이나 괭이도 없었던 옛날, 그것도 단시일 내에 50-100여기의 묘를 쓰고 일일이 묘를 만들어준다는 것은 주민들의 작업으로는 어림도 없으며 군이나 국가의 지원, 또는 시책이 아니였으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살펴진다.
(불과 40여년전 노라호나 사라호태풍 때에도 해변가에 떠밀려온 시체들은 그대로 방치되어 부패 되거나 그 자리에 풀을 덮어주던가 혹은 가매장해 주었던 것이 고작이었다)
5)혹 총이나 왜총이라는 지명 과 같은 집단매장지가 있다면 몰라도 전란속 에서 왜군의 묘 50-100기를 일일이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렵다.
6)400년의 긴 세월이면 아름드리 소나무가 몇 번인가 봉분에서 자라고 쓰러졌을 것인데 주인 없이 긴 세월을 지낸 묘들이 거의 원형그대로 남아있다는 것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앞으로의 전망과 과제
앞으로 이문제가 더 진척되어 왜덕산이 일본군의 묘군 으로 기정사실화되고 일본 참배객들이 대거 몰려온다면 종국에는 일본 사학계는 물론 육군성이나 해군성에서도 더 큰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실지 확인조사가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이루어 질것이며 만약 이때 확실한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이 날 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한국인의 묘지를 속아서 참배했던 일본인들의 분노는 누가 책임질 것이며 조상의 묘를 외국에 팔아 돈을 벌었다는 비난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
확인절차도 없이 일본인들을 현혹한 당국은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중대한 과오를 낳을 것임을 심히 우려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국제적인 문제는 많은 시간을 두고 객관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증거확보가 우선되어야 한다.
결론하여 이 문제는 필요하다면 일본 사학계와 '공동발굴조사용역'으로 그 결과에 따라도 늦지 않을 것임을 제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