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 남선 서당골에 머물며 방축 완성
<수문에서 바라본 굴포방조제와 굴포만>
진도의 옛날 지도를 보면, 소포만이 남쪽으로는 장구포를 지나 십일시까지 뱃길을 열고 있고, 동쪽으로는 진도읍 동외리까지 뱃머리를 대고 있다. 첨찰산에서 흘러내린 빗기내 물줄기는 돈지벌을 지나기도 전에 바닷물과 합장한다. 바닷길이 몸섬 곳곳으로 파고 들어온 탓에 진도는 사방으로 물갈퀴질을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지금의 진도는 변신술이라도 부린 듯 전혀 다른 모습이다. 진도 전역에서 벌어진 간척의 결과다. 해안선의 갯벌도 대부분 매립되었는데, 간척 사업으로 본도 면적만 32%가 증가했고 대부분은 농경지다. 진도 쌀 농업사 자체가 간척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진도에서 간척 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쌀을 생산하기 위한 농토가 절실했다. 진도가 한때 옥주(沃州)라 불렸다는 이유로 땅이 비옥하고 먹을 것이 풍족했다고 해석되기도 하지만, 갯벌 간척 사업 이전에 진도의 농토는 아주 협소했다. 고려와 조선시대 기록을 보면 진도는 대부분 목초지였다. 한때 진도 전역에 말을 놓아 키울 만큼 진도는 군마 목장으로 최적지였고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농지는 풍족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 후기 이전에 진도 땅은 척박한데다 왜적의 잦은 침입으로 거주민들도 많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난의 역사에서 진도는 세 번이나 섬을 비웠고, 진도로 자진 이주해 온 사람들의 삶도 고달팠다. 그네들은 군인들과 그 가족, 유배된 관료들, 과도한 납세를 피해 입도한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런 이유로 공출을 탕감해 주기도 했다.
둘째, 진도는 방조제 둑을 크게 높이지 않아도 태풍이나 해일 등의 피해를 덜 받는 자연환경조건을 갖추고 있다. 또 방조제 둑은 모래흙보다는 점질토와 자갈 등이 섞여 있어야 단단해져 무너지지 않는데, 농사짓기에는 어려운 진도의 토질이 둑을 쌓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다. 해남 윤씨 일가가 대대로 진도와 해남, 완도에서 간척 사업을 벌인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인 1255년(고종 43)에 국가에서 처음 방조제를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시대인 1660년대 고산 윤선도 선생이 진도 굴포 갯벌을 막아 간척을 한 것이 민간인 최초의 방축 사업이었다고 전해진다. 1920년대 일제가 산미증식운동을 목적으로 수리조합을 만들면서 근대적 방조제 공사가 시작되었다. 1970년대 소포방조제를 시작으로 최근 군내지구 방조제까지 진도의 지도를 바꿀 만한 대규모 방축이 이뤄졌다.
굴포 방조제는 구역 면적 59㏊, 간척 면적 51.2㏊, 높이 2.8m, 길이 294m이다. 고산 선생이 막은 원뚝을 1946년 보강한 것이 지금의 18번 국도가 지나는 방조제다. 주민들은 그곳을 ‘윤고산 둑’이라 부르는데, 방축에 관한 전설이 지금도 그곳 논두렁에 넘실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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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 년 전, 윤선도가 굴포에서 잠시 머물고 있을 때였다. 당시 백동 앞은 갯벌이었다. 월출봉 아랫자락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곳을 갈하입해(渴蝦入海) 지형이라 했다. 목마른 새우가 물을 건너 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윤선도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축조술을 활용해 그곳을 간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원둑에서 가장 가까운 쩍벌하고 둑을 연결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썰물 때 쌓은 둑이 들물 때 무너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실패가 거듭되다 보니 윤선도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었다.
어느 날 윤선도는 원둑으로 기어가는 구렁이를 보고 밤새 뒤쫓아 가는 꿈을 꾸었다.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 밖으로 나가 보니 구렁이가 기어가던 길에 서리가 하얗게 내려 있었다. 윤선도는 그때서야 머리가 맑아지는 듯했다.
그는 구렁이가 지나간 길을 따라 둑을 쌓기 시작했고, 기이하게도 둑은 더 이상 무너지지 않았다. 지금도 윤고산 둑은 뱀이 기어가듯 구불구불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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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선생의 간척 공사로 많은 사람들이 백야(백동), 신동, 굴포, 남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은 간척을 돕는 대신 토지를 불하받아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해남 윤씨가의 기록에 의하면 굴포 간척사업은 고산 선생이 태어나기 전 그의 조부 윤의중(1524~1590) 때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산 선생이 열 살 때인 1596년에 굴포에서 소작료를 받아간 기록이 있고, 당시 소작인이던 강씨 등이 소작료가 비싸다며 탄원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산 선생이 굴포리에서 기거하게 된 이유는 조부 때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관리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윤고산 둑은 그의 조부 윤의중 때부터 시작되어 고산 선생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해남 윤씨가는 서남해안 해언전(海堰田)을 개척해 입안(立案)을 받아 재산을 형성했고, 이를 바탕으로 병자호란 때는 가솔들과 장정을 모아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다고 한다. 고산 선생은 병자호란을 겪고 나서 보길도에 거처를 정한 뒤에는 더 이상 육지로 나가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도 그는 고흥 거금도를 방문하고, 진도 굴포와 완도 노화도에 새로운 간척지를 개발했다. 고산 선생이 ‘和李政丞 三首(화이정승 삼수)’라는 시를 지으면서 ‘이경여(李敬輿)가 진도에 귀양 와 있을 때인 병술년(1646)’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근거로 그가 진도에 머물며 간척을 완성한 시기를 60세인 1646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피고 배중손에 승소한 원고 윤선도
<△ 상우-굴포신당 옛 모습과 고산목 옆에 장승이 쓰러져 있다. 상좌-배중손사당인 정충사 문 앞에 놓인 박하사탕, 아래-고산선생사적비와 신당유적비>
삼별초 수령이었던 배중손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정충사’에 들어서면 오른쪽으로 정원이 있고 ‘고산윤공선도 선생 사적비(孤山尹公善道 先生 史蹟碑)’와 ‘굴포신당유적비(屈浦神堂遺蹟碑)’가 보인다. 이 사적비는 1991년 네 부락 주민들이 고산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신당유적비는 이보다 앞선 1986년에 주민들이 당제를 지내던 터를 기록하기 위해 장승과 함께 세웠다. 이후 장승은 차량에 치여 방치된 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굴포 사당의 내력은 조사자나 증언자마다 차이가 있다. 배중손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당제를 모시기 위해 1959년 처음 사당을 건립했으나 태풍 등으로 퇴락하자 1999년 재건축했다는 주장이 있다. 정충사라는 현판과 배씨대종회에서 건립한 동상을 보면 원래부터 이곳이 배중손 사당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하지만 현재의 배중손 사당(신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당제를 지내왔던 주민들의 이야기는 엇갈린다. 예로부터 고산 선생이 둑을 막아 쌀을 생산할 수 있는 농지를 만들어 식량난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사당을 세웠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네들은 배중손 사당 내에 있는 수백 년 묵은 소나무(2005년 3월 보호수 지정)를 지금도 ‘고산목’이라 부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 주민들이 정월 대보름에 고산 공적을 기리는 제를 올린 사실을 보더라도 사당의 기원이 고산 선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003년 7월 15일, 광주지법 해남지원에서 원고 윤선도와 피고 배중손에 대한 판결이 있었다. 조정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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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 배중손의 사당을 별도의 장소에 이설하기로 하고, 그때까지 고산 윤선도선생, 배중손장군, 삼별초군 세 위패를 봉안한다.
2, 굴포 사당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도록 진도군에서 적극 노력한다.
3, 굴포리 마을사람에게 정월 대보름 당제(堂祭)에 제찬대(祭餐代)로 200만원을 계속 지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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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등록이 추진되고 있는 배중손 사당>
이에 따라 진도군은 그 해 11월 2일, 조정 내용을 이행하겠다는 내용을 원고 측에 서면으로 보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 판결은 굴포당의 원 주인이 고산 윤선도 선생이라 말하고 있다. 법원은 왜 이런 판결을 내렸을까? 주민들은 마을 출신 백포 곽남배 선생의 노력으로 처음 사당이 세워졌고, 이후에 복원하면서 배씨종친회에서 정충사와 동상을 건립했다고 말하고 있다. 배중손 장군 사당을 세우기 전에도 백포 선생은 당 앞에 장승을 세우는 등 신당 복원과 유지에 적극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사당을 짓기 전에 신당이 있있고, 사당이 세워지면서 원래의 신당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역사는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고려시대 자주항몽의 영웅으로 칭송되는 배중손 장군이 굴포와 연관이 있다는 어떠한 역사적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조차 없다. 그와 함께 삼별초의 주축이었던 김통정 장군에 대한 기록과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배중손 장군이 여몽 연합군에 대응해 남도석성 또는 굴포벌에서 최후의 항전을 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라 가설일 뿐이다.
(※현재 진도군에서는 삼별초 유적 복원 사업을 중점적으로 벌이고 있다. 하지만 대몽항쟁이라는 명분만으로 특정 인물을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소설화된 역사적 관점으로 유적을 복원하는 일은 재고해야 한다고 본다. 삼별초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진행중이다. 그들이 귀족과 노예들을 인질로 잡고 진도로 남천을 하는 과정과 진도에 세운 정권 또한 정통성 논란이 있다. 그들이 대몽항쟁을 주도하기는 했지만, 권력 유지를 위해 백성들을 인질과 노예로 삼았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삼별초에 대한 스토리텔링은 다음 지면으로 미루고자 한다.)
◆백동 들녘에 숨겨진 보물들
① 대한민국 민간간척지 1호 ‘고산 윤선도쌀’
백동과 남선, 굴포, 신동 앞에 펼쳐진 들녘은 근대 간척이 시작되기 전까지 진도의 최대 쌀 생산지 가운데 하나였다. 남선 앞 들녘은 남도진 군인들이 자경을 하던 번답이기도 했다.
백동 들녘은 북쪽으로는 희여산이, 서쪽으로는 월출산 질매봉이, 남쪽으로는 기와등처럼 이어진 소산 등허리가, 동쪽으로는 신동 연대봉이 둥지를 틀고 있다. 새의 둥지와 같은 천혜의 보금자리다. 그러면서도 굴포는 바다로 통하고, 연동으로 가는 백동재, 동령개 넘어 남도포로 가는 상골재, 신동에서 송정으로 가는 용골재는 네 개 마을 사람들이 삶터로 드나드는 통로가 된다.
이처럼 백동 들녘은 친환경 농업단지로서 최적 환경을 갖추고 있다. 울진의 왕피천처럼 깊은 두메산골이 아니면서도 독립된 단지 규모로 친환경 농업을 산업화할 수 있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 전남 인문학과 실용주의의 핵심 인물인 고산 선생의 ‘민간간척지 1호’ 브랜드를 살려 진도의 대표 쌀로 키울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② 굴포 멸치와 디포리
굴포 포구는 한때 임회․지산의 제1 어항이기도 했다. 굴포에서 생산되는 멸치는 육질이 쫄깃하고 은은한 향이 우러난다고 한다. 우리나라 해역에서도 조류가 가장 센 어장에서 살아가는 멸치이기 때문에 맛은 담백하고 빛깔도 짙다. 봄에는 주로 잔멸치가 잡히고 7월부터 3센티 이상의 큰 멸치가 잡히는데, 갓 잡은 멸치를 바로 건조시켜 배송해 주기도 한다. ‘굴포햇멸치’는 벌써 싱싱한 멸치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굴포에는 멸치 외에도 디포리라 불리는 밴댕이가 많이 나고 있다. 디포리는 젓갈용으로 쓰거나 국물을 우려내는 데 인기가 높다. 한때 굴포 바닷가는 디포리와 멸치를 말리는 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치 은박지를 깔아놓은 듯 반짝거리기도 했다.
③ 사계절 낚시 공원
굴포 해안은 오래 전부터 낚시공원이었다. 한때 보물섬사건으로도 유명했던 대섬과 소당도․대소당도, 그리고 남동에서부터 죽림 헌복동까지 이어지는 갯바위는 비경이면서도 진도 최고의 낚시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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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에 벌어진 이용호게이트는 일제강점기 일본이 패주하면서 하야시라는 해군장교가 진도 대섬에 금괴를 대량으로 숨겼다는 소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대섬에서 수많은 쇠말뚝이 발견되었는데, 마침 일본이 한반도 혈맥을 자르기 위해 박은 쇠말뚝을 제거하는 일이 전국적으로 이슈가 되었기 때문에 금괴설은 싱빙성이 있어 보였다. 이용호는 자회사인 삼애인더스를 내세워 금괴발굴 작업을 시작했고 주가가 폭등해 25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겼다. 하지만 해상크레인과 각종 중장비를 동원해 원통형 물막이까지 설치했으나 보물찾기는 실패하고, 이용호는 주가조작과 횡령으로 구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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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 웃을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지만 대섬 그 자체가 보물섬인 것만은 사실이다. 남동-동령개-굴포-귀성-탑리-헌복동 밸트를 낚시공원으로 조성하게 되면, 보물섬은 순례를 오는 낚시객들로 붐빌 것이다.
④ 오손도손 나눠먹고 사는 4형제 마을 공동체
백동리(白洞里)
백동(白洞)은 원래 백야리(白也里)와 만세동(萬世洞) 두 개의 마을이었다. 지금의 희여산(백야산) 아래 있는 백동저주지에 만세동이 있었다. 저수지 공사로 만세동 주민들이 백동 윗마을로 이사하면서 두 마을은 하나의 부락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560년경 강씨들이 윤씨 간척답도조로 입촌했다고 전해진다. 백동 마을 형성에도 윤선도 선생의 간척사업이 직접적인 역할을 한 것이다.
신동리(新洞里)
신동리는 1700년경 황씨가 입촌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윤선도 선생의 간척 사업 후에 새로 생긴 부락이라 하여 신동(新洞)이라 불렀다. 간척 사업으로 쌀이 생산되지 않았다면 신동마을도 생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신동 뒷산에 굴라포연대가 있어 ‘연대밑애’라고 불리기도 했다.
굴포리(屈浦里)
굴포는 반농반어촌으로 바다에는 죽도․대소당도․소당도가 있다. 예전에는 굴개 또는 굴포라 불렸다. 현재는 굴포와 짝별을 합쳐 굴포리라 부른다. ‘굴포식당’은 걸쭉한 졸복탕으로 유명한 맛집이기도 하다.
남선리(南仙里)
남도만호진 군인들의 번답이 있던 곳으로 쩍골(절골=무학골)이라 불리기도 했다. 마을 앞에는 애향시비가 있다. 군인들의 후세이기 때문인지 남선 출신들은 외모가 훤칠하고 기개가 높다.
남선에 오면, 남선에 가면
콧노래가 나온다, 휘파람이 나온다.
만나는 얼굴마다 정이 담긴 웃음이오.
맞잡은 손마다, 하나되는 마음이네.
어릴 때 뛰어놀며, 꿈을 키운 산도 들도,
고희 맞아 다시 봐도 그리운 그 추억.
함께 놀던 동무들을 다시 볼 수 없지마는
못 잊은 이름이오, 안 잊히는 얼굴이네.
고구마 푸성귀로 못 다 채운 시장기를
한 바가지 물 마시고, 가슴 펴고 하늘 보던.
그 시절은 가난해도 마음은 부자였고,
무명옷 걸쳐도 추운 줄 몰랐었네.
쳐다보는 하늘에는 흰 구름이 피어나고
피어나는 구름 위에 우리 꿈도 피어나리.
남선에 올 때마다 그리움이 서려 있고,
남선에 갈 때마다 평안함이 넘쳐나네.
고구마 푸성귀로 시장기는 못 채워도,
파아란 하늘 있고 정겨운 산 있는 곳.
너와 내가 태어나고 우리들이 살아온 곳.
뜻 모아 힘 모아, 사랑으로 가꾸어 가리.
⑤ 복원 가능한 기억들
◯ 기우제
백동 들녘의 네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6월 1일에 순번을 정해 기우제 행사를 열었다. 적당한 비가 내려 풍년농사가 되도록 해달라며 용적골 상단 큰 고랑(산 100번지)에서 제를 올렸다.
◯ 봉화제
신동 연대봉(산4번지)에서 장작이나 보릿대 등을 쌓고 불을 피우며 풍년과 무사태평을 기원했다. 기우제와 형식은 비슷하나 여귀산 봉화의 간봉이었던 굴라포 연대터였기 때문에 역사적 배경도 엿볼 수 있다.
◯ 용등초등학교
용등초등학교는 1946년 석교공립초등학교 분교로 인가를 받고 처음 마을회관에서 개교했다. 당시 학교를 세우려면 부지를 주민들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주민들은 농악대(설쇠 강운태)를 만들어 건립을 하며 기금을 모았다. 주민들의 노력으로 1949년 교사를 완공해 용등국민학교로 승격했고, 1963년 연동 분교를 두게 될 정도로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탈농촌 현상으로 학생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2009년 폐교되었다.
용등초 동문들에게 동심과 추억이 담겨 있는 모교 폐교는 가슴 아픈 일이었을 것이다. 용등초는 폐교 이후에 방치되어 있어 폐허가 된 듯하지만, 구석구석 둘러보면 아직은 옛모습이 남아 있다. 탈농 현상으로 학생수가 크게 줄어들어 폐교를 거스를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동문들 또는 마을 주민들이 건립 당시의 정신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4형제 마을 주민들이 모여 공동 임대하거나 매입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협동조합과 같은 법인체를 구성해 체험과 휴식 공간으로 가꿔나가면 좋을 것 같다. 앞으로 더욱 발전하게 될 팽목항(진도항)으로 가는 18번국도 길목이라는 점에서 눈에 띄는 컨텐츠만 있다면 여행객들의 발길을 잡아끌 수 있는 여건은 충분하다.
<2009년부터 폐교되어 방치되어 있는 용등초등학교>
※ 옛 용등초등학교를 주민들과 동문들의 삶터로 다시 건립합시다!
▢ 체험거리
- ‘윤선도 쌀’ 만들기 : 정미부터 소포장까지 관광객이 직집 체험, 포장지도 직접 제작
- 굴포 멸치/디포리/다시마 등 해조류 요리
- 덕장에 김 말리기
- 진도북놀이 등 민속악 배우기
- 승마
- 자연친화형 낚시
- 낚시 공원 사업 유치 → 치어 양식 사업 → 치어 방류 체험
▢ 휴양
- 용등초 부지 내 팬션 또는 캠핑장 신설
- 남선 소산 일대에 조성되어 2017년 개장 예정인 국립자연휴양림과 연계해 둘레 주요 산 등산로 복원
김남용 전문위원
시집 <시의 유서> / <수피의 우화> <행복1번지> 등
현재 '진도오곡협동조합' 대표
장성천류 진도북놀이보존회 회원